'대기업에 있었을 땐 몰랐던 것들', '큰 회사에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된다.' 그리고 얼마 전 내 피드에 노출된 '대기업 길게 보면 독이 됩니다.' 등 유독 대기업 재직에 대해 왈가왈부가 많다.
이런 얘기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몇몇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 대기업 퇴사를 캐치프라이즈로 자신을 브랜딩
-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함
- 작고 (빠른) 팀에서 일하는 것을 신성시
- (가끔 자극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머기업에 멀쩡히 잘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불안을 조성함
본인도 큰 회사에 있었음으로써 누린 것을 배제하거나 단순히 마케팅 소재로 소비하는 등 아쉬움이 많다. 그렇다면 스타트업, 작은 팀에서 일하면 반드시 성장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성장할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성장한다.’이다. 물론 밀도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작은 팀, 그 중에서도 우리가 초기 스타트업이라고 부르는 조직에 대한 환상과 착각을 짚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성장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을 짚어 보려고 한다. 당연히 작은 조직에서 성장할 수 있는 부분도 많지만 이런 얘기는 이미 수많은 글에서 얘기하고 있으니 생략하기로 한다.
위험한 착각
작은 조직에 대한 환상이 여러 착각을 만드는 것 같다.
슈퍼맨이 되겠지?
내가 모든 것을 다 만들거라는 착각이 있다. 이미 많은 것이 되어있는 조직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적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은 조직에선 시간이 더 중요하다. 그것들을 처음부터 만들기 보단 잘 만들어진 것을 가져다 쓰기 바쁘다.
다른 전문팀의 것을 사용하느냐 외부의 것을 사용하느냐의 차이다. 긍적적으로 표현하자면 써드 파티 연동에 대한 전문성을 기를 수 있다.
나의 회사?
작은 팀일수록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이 더 투철해질 것이라는 환상도 있다. 이건 큰 회사에서도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회사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원래 주인의식 없이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작은 팀에 합류한다 해서 없던 주인의식이 생기지 않는다. 실제 내 지분이 99%가 아닌 이상 주인의식이 어떤 외부의 요인에 의해 생기긴 어렵다.
내 사업을 하는 것 같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월급이 들어오는 이상 그냥 고용된 직원일 뿐이다. 월급을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은 관점 자체가 다르다.
개발자 관점
작은 팀은 PMF를 찾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가장 귀중한 자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빠른 이터레이션을 기반으로 검증하는데 초점을 맞추곤 한다. 보통 들어가는 비용 대비 아웃풋이 체감되지 않을 때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다보니 아니면 버리고 다시 만드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제품이 몇일을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나뉜다. 이런 환경이다보니 할 수 있는 경험과 그렇지 못하는 경험이 있다.
코드
몇일동안 운영할지 모르는 코드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작성할 여유는 없다. 실제로 내가 작성했던 코드가 금방 사라지곤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과거에 작성한 코드를 수정하는 경험을 하기 어렵다.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 경험은 큰 배움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과거에 작성한 코드들이 사라지고 없다면 수정할 일도 없다. 모든 설계에는 트레이드 오프가 존재하며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책임지고 그 결과를 마주할 때 성장할 수 있다.
테스트 코드는 돈을 잘 벌고 있는 코드에 대해서도 작성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아직 검증 단계인 코드는 더욱 테스트 코드를 작성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기능을 변경할 때 수정해야 하는 부분을 하나 더 늘리는 꼴이 된다.
문서
대부분의 경우 문서를 쓰지 않게 된다. 문서는 계륵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 당시 이미 다 아는 내용이고 몇명 안 되는 팀원들이 전부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정리하지 않는다. 문서는 코드와 다르다. 컴파일 되지 않는다. 많이 작성해보고 많이 읽어보고 많이 읽혀봐야 좋은 문서를 쓸 수 있다.
AI
이 관점에 ai를 얹어보자. 직접 하기 보다는 문제를 작게 나누고 잘 지시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AI가 코드를 생성할 때 기준이 되는 시스템이 중요해졌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위에서 LLM에게 시켜야 한다. 그래야 그저 그런 평균의 제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제품이 만들어진다.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당연히 비용이 들어가며 그 중 가장 비싼 것은 시간이다. 그 결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신 일단 바로 만들곤 한다. AI 덕분에 기존보다 더 빠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과 제품을 만드는 것은 코드를 작성한다는 것의 작은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여러 방면에서 다르다. 조금 더 소프트웨어 설계 원칙에 입각하여 확장성을 고려해야 하며 단일 책임이라는 것을 조금 더 신경써야 그 시스템이 기반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제품만을 위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고민이 필요하게 되고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마무리
제품에 대한 책임감, 조직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효능감. 큰 회사에선 이런 것들이 덜해진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이것은 속한 조직에 따라 달라지기 보다는 개인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경험해보지 않는 것 보단 경험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큰 회사에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작은 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쓰는 근육이 조금 다를 뿐. 오로지 스타트업에서'만'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수많은 글 속에서 이 글이 균형잡힌 관점에 기여하면 좋겠다.
만약 이 글이 반감을 산다면, 삼O이나, 현O처럼 정말 전통적인 대기업을 대입하여 여러 정치나 부정적인 것들을 대입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