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edit button

운의 표면적

10 min read|25. 7. 14.

'저는 운이 꽤 좋은 사람입니다.'

인터뷰, 커피챗을 하면서 최근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생각은 5년 전 처음 했던 것 같다.

내 처지에 만족하는지, 어떻게 바라보는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가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질문이 돌아오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피부로 느꼈던 사례 몇 가지를 이야기 하곤 한다.

대학교를 자퇴하고 '이상한 교육 기관'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면서 부모님이 이야기 하시길 겉으로 표현은 안 하셨지만 걱정을 굉장히 많이 하셨다고 한다. 공부를 시작할 때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도 받았다. 덕분에 땅값 비싼 분당에 작은 방을 얻을 수 있었고 생활비, 식비 걱정없이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교육 기관에서 수료 했을 때 나에겐 그 어떤 빚도 없었다. 수료하는 시기에 해커톤으로 인턴을 채용하는 네이버 공채가 열렸다. 알고리즘 코딩 테스트 보단 실전형 프로젝트가 나를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좋은 기회가 생겼고 네이버라는 좋은 팀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환경에서 잘 성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운만 좋아서 이룬 것들은 아니다. 처음 개발을 공부할 당시엔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매일같이 열심히 했고 그러던 중에 좋은 기회가 와서 잡을 수 있었다. 분명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저 성실하게 한다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조차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작은 성공에 있어서도 운이라는 것이 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겸손해졌다. 한편으론 이 운을 높이려면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해봤다. 운은 결국 어떤 충돌, 마찰을 통해 발생한다는 관점이 생겼고 잦은 충돌이 있어야 운이 높아진다는 나름의 결론에 다다랐다. 여기서 충돌은 사람간의 충돌이다. 만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겠지만 사람을 우주라고 비유하고 충돌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다. 살아온 배경과 겪어온 것들이 우주를 이룬다. 서로 다른 두 우주가 만났을 때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표면적

‘운을 높인다'라는 표현은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고정된 값인 높낮이 보다는 확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운의 '표면적'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구체화했다. 정의한 운의 표면적은 2가지 축이 존재하는데 한 가지 축은 시간이라는 X축이고 다른 한 가지 축은 공간이라는 Y축이다.

시간 축

충돌의 횟수를 늘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오래하는 것이다. 정직하게 비례한다. X축을 길게 늘리면 총 표면적을 넓힐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알지만 못하는 효과적인 학습 방법 글 에서도 얘기했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중간에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하는 것이 꾸준함이다. 연속적으로 한다는 다른 표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9년 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정말 많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내가 쓴 글들이 나를 대신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개발이 재밌었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았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었다.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보다 어떻게 꾸준히 할 것인지 고민하는게 더 중요하다.

가끔 셀프 브랜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하면서 여러 브랜딩과 관련된 스킬들을 소개하는 광고를 본다. 이젠 개발자도 셀프 브랜딩해야 한다며 FOMO를 자극한다. '브랜딩'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브랜딩은 기본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아침에 HERMES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공간 축

삶의 반경, 네트워크를 공간이라고 표현해봤다. 살면서 우리가 지나는 길은 생각보다 좁다. 집에서 회사까지. 회사에서 운동이나 취미하는 공간까지. 가족이 지내는 곳까지. 그만큼 만나는 사람도 한정적이고 이야기 나눌 사람은 더 적다. 지금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내가 가진 공간을 넓히는 방법이다. 다른 회사의 사람, 다른 분야의 사람과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EO하우스에서 하는 파티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네트워크가 이어져 입사하기 전까지 진행된 경우도 있다. 옛날 타입스크립트 코리아라는 커뮤니티에 참여하면서 만난 운영진 분에게 추천을 받기도 했다. 우연한 만남이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개발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대학교 시절 딴짓 때문이었다. 들어야 하는 수업은 듣지 않고 공모전에 나가곤 했다. 공모전 상금으로 용돈을 벌곤 했는데 그러면서 개발, 정확히는 코딩에 관심을 갖게 됐다. 새롭고 낯선 경험이 내가 속해있는 범위를 넓히곤 한다.

마무리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만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온갖 사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지만 각각의 의미에 따라 고유한 방식으로 배열된다. 이는 끊임없는 깨달음의 실타래다. - 유도라 웰티